내가 정신력이 약하다고? ‘갑자기 꿈꾸는 병’, 기면증의 진짜 증상

내가 정신력이 약하다고? ‘갑자기 꿈꾸는 병’, 기면증의 진짜 증상

A yawning cat

학창 시절부터 군대, 직장 생활에 이르기까지, 저는 수십 년간 ‘잠과의 전쟁’을 치러왔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께서 깨워도 곧바로 다시 잠들었고, 점심 식사 후 수업시간에는 교실 뒤에 나가 손을 들고 벌을 서는 도중에도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심지어 엎드려 뻗쳐있는 벌을 서다가 잠이 들어 쓰러진 적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저를 향해 “정신력이 약하다”, “의지가 부족하다”고 쉽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잠이 많은 성격’이나 ‘의지 박약’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간 저를 괴롭혀 온 이 고통에는 분명한 의학적 진단명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면증(Narcolepsy)’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면증을 그저 ‘어디서든 갑자기 잠드는 병’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이는 렘수면(REM) 단계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하며 발생하는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수면 장애입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겪었던 기면증의 진짜 증상과 그로 인해 발생했던 일상 속 에피소드, 그리고 이 병에 대한 사회적 오해를 다루어보려 합니다.

1. 예고 없는 렘수면 침투: ‘갑자기 꿈꾸는 현상’

Sleep cycle

기면증 환자가 겪는 핵심 증상 중 하나는 바로 ‘렘수면 개시 수면(SOREMs)’입니다. 정상적인 수면은 얕은 잠(비렘수면) 단계를 거쳐 깊은 잠, 그리고 마지막에 꿈을 꾸는 렘수면 단계로 진입합니다. 하지만 기면증 환자는 이 단계를 건너뛰고 비정상적으로 렘수면 단계에 바로 진입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상생활 중 저에게는 ‘갑자기 꿈을 꾸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회의 중이거나 수업을 듣다가 갑자기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생생한 꿈을 꾸곤 했습니다.

(상황) 선생님이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이라고 설명하는 순간, 제 의식은 갑자기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으로 전환됩니다. (행동) 남들이 보기에는 제가 펜을 들고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필기 중인 노트에 꿈의 내용인 ‘절벽’을 의미 없는 글씨로 끄적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면증 환자는 깊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하루 종일 렘수면이 시시때때로 침투하는 경험을 하게 되며, 이는 극심한 피로감과 집중력 저하의 주요 원인이 됩니다.

2. 사회생활을 파괴하는 ‘통제 불능의 졸음’

A person sleeping at a desk

가장 흔하고 괴로운 증상은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과도한 주간 졸림증(Excessive Daytime Sleepiness, EDS)입니다. 특히 식사 후, 운전 중, 단조로운 활동을 할 때 졸음은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위험한 순간들: 공사장에서 알바를 할 때 엄청난 소음 속에서도 점심 식사 후 바로 잠들었고, 군대에서 운전 조교로 일할 때 잠시 졸아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경험도 있습니다. 운전 중 차가 막힐 때나 연애 중 데이트를 하다가도 잠이 들어 주변 사람들을 당황시키거나 화나게 했습니다. 오해와 편견: 이런 모습 때문에 저는 “밤에 뭘 하길래 저렇게 자냐”, “의지가 없다”, “게으르다”는 비난을 끊임없이 들었습니다. 정신력으로 이겨내려 커피를 들이붓고 서서 버텨도, 뇌가 잠을 거부하지 못하고 바로 렘수면으로 빠져버리기 때문에 저항은 무의미했습니다. 수능과 재수 시험의 점심시간 이후 영어 듣기 평가 시간에는 어김없이 졸아버렸던 것도 이 병의 증상 때문이었습니다.

3. 기면증 진단 과정과 ’30초’의 충격

결국 건강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껴 전문 수면 센터를 찾았고, 밤에 수면 상태를 측정하는 수면 다원 검사와 낮에 잠에 드는 시간을 측정하는 반복 수면 잠복기 검사(MSLT)를 진행했습니다.

MSLT는 낮 동안 여러 번 잠을 자라고 한 뒤, 잠들기까지 걸리는 시간(잠복기)과 렘수면 도달 여부를 측정합니다. 의사 선생님은 보통 기면증 진단을 받으려면 특정 기준(평균 잠복기 8분 미만 등)을 만족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제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평균 50초 만에 잠들었고, 가장 빨랐을 때는 불과 30초 만에 잠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이 정도 수치는 매우 드물다며 ‘병원에서도 탑급’ 수준의 기면증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이 진단은 오랜 기간 저를 괴롭혔던 모든 일들이 제 잘못이나 의지 문제가 아닌, 뇌의 문제였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4. 기면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이 필요한 이유

A photo of a sleeping child having a dream

기면증을 진단받고 약물 치료를 시작했지만, 사회적 인식이 바뀌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제가 기면증을 고백했을 때, “그깟 잠!”, “커피 마셔라”, “밤에 일찍 자라”는 식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심지어 “혹시 길 가다 쓰러져 본 적 있냐”며 자극적인 증상만을 궁금해하기도 합니다.

기면증은 단순히 잠이 쏟아지는 병이 아니라, 삶의 질과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만성 신경계 질환입니다. 깊은 잠을 거의 잘 수 없는 구조적 문제로 인해 환자들은 평생 ‘개운하게 잘 잤다’는 느낌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기면증 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력’을 요구하는 비난이 아니라, 이 병을 이해하고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사회적 배려입니다. 저의 솔직한 경험담이 기면증 환자들에게는 공감을, 비환자들에게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올바른 인식 개선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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